[무소유 즉문즉설] <6> 서영남 민들레국수집 대표
‘나는 없다’는 마음으로 사는 게 잘 사는 길
돈 없고, 사람 모자라 못한다는데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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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평화결사와 <한겨레>가 ‘우리시대 무소유의 길을 묻다’는 주제로 공동주최한 즉문즉설이 지난날 28일 오후 4시 서울 홍대앞 클럽 오백에서 막을 내렸다. 이날 6번째 마지막 강사로 나선 이는 인천에서 노숙자들을 위한 민들레국수집을 운영하는 가톨릭 수사 출신 서영남 대표(56)였다.

 
이날 생명평화잔치와 함께 열린 즉문즉설 현장엔 200여 명이 입추의 여지 없이 들어차 서대표의 말을 경청했다.  이날 즉문즉설장엔 서 대표의 아내 베로니카와 딸 모니카가 함께 나와 청중들의 질문에 답하기도 했다. 청중들은 실천하는 ‘거리의 성자’와 가족들을 통해 욕망에 찬 내면이 정화되는 체험을 만끽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노숙자의 대부로, 실천하는 ‘거리의 성자’
 
 -(사회자 황대권, 강사 소개)
 “일생에 이런 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서 선생님이 노숙자의 대부라고 해서 노숙자들이 많이 올 줄 알았더니 잘 안 보인다. 1954년 부산 범내골에서 태어나 76년 한국순교복자회수도회에 들어가 85년 종신서원을 해 수사의 길을 걸었다. 1995년부터 전국 교도소 장기수들을 상담하며 돌봤다. 그 일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2000년에 출소자의 집인 평화의집을 열어 운영했다. 25년 머물던 수도원에서 나온 것은 그가 하려던 봉사를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수도원을 나와 2003년부터 인천에 무료식당 만들었다. 서영남 선생님이 쓴 <민들레국수집의 홀씨 하나>를 읽어보면  다 나와 있다. 진짜 읽어봐라. 그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그 책을 읽으면서 저 자신의 나태함을 꾸짖었다. 그 책을 읽어보면 인생을 되돌아보게 된다. 2008년 어린이들을 위한 무료식당인 민들레꿈 어린이밥집을 열었다. 그리고 쉼터와 지원센터, 도서관, 민들레복지타운을 형성했다. 빈털터리 몸으로 자원봉사의 힘으로 꾸려나갔다. 이 사회에 나눔의 순환이 되도록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한 달에 두 차례 목요일과 금요일 청송교도소 등 장기수를 면담하고 있다. 하루도 쉬는 날이 없다. 이제 누구나 질문하라. ”
 

 
수도원에서 마흔일곱에 가방 하나 달랑 들고 나왔는데 횡재
 
 -25년간 몸담은 수도원 나와 수사생활을 접고 내 뜻대로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서 나왔는데, 그 후 호박이 넝쿨째 들어왔다고 했다. 가족을 만들려고 수사생활을 때려치운 것 아닌가. (서영남 대표는 수사를 그만두고 민들레국수집을 운영하며 가장 어려운 시기에 현 부인인 베로니카의 ‘배려’로 베로니카-모니카 모녀가 사는 집에 들어가게 되어 한 가족이 되었음)
 “제가 요즘 밤에 자다가 꿈을 꾸면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이윤영 신부님을 만난다. 이윤영 신부님이 처음 수련장이었다. 신부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그분으로부터 삶을 배웠다. 돌아가신 지 16년 됐는데도 꿈 속에 나타나 ‘서영남 제대로 살아라’고 꾸중을 한다. 수도원을 나온 것은 수도원이 나쁘거나 힘들어서가 아니었다.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수도원에 들어가면 좋겠다. 하지만 2000년 11월에 가방 하나 들고 나왔다. 겁도 없이. 그때 나이가 마흔일곱이었다. 장가가리라고는 전혀 생각 못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이 돈도 못 벌고 쓸 줄밖에 모르는 내가 결혼을 하겠다면 도둑놈 심보 아니겠는가. 그런데 베로니카가 들어와서 살아도 좋다고 해서 그렇게 됐다. 횡재한 경우다.”
 
 -선배 신부님이 ‘꿈 속까지 나타나 바르게 살아라’고 했다는데, 어떻게 사는 게 바르게 사는 것인가.
 “자기를 중심으로 잡지 않고, 남을 중심으로 해서 살면 바르게 사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다. 아까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분의 아이디가 ‘나무’라고 해서 ‘나도 나무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무(나無), ‘내가 없다’는 뜻 아닌가. 가장 잘 사는 길은 내가 있어야 되는 게 아니라, ‘나는 없다’는 마음으로 산다는 것 아닌가.”
 
 -선생님 책 <민들레국수집 홀씨 하나>를 보니, ‘누가 돌봐주기를 바라지 말고, 당신이 남의 버팀목이 되어야 잘 살 수 있다’고 되어있던데,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배경이나 철학은 무엇인가.
 “감옥에 있는 형제들로부터 편지를 받아보면 대부분이 ‘너무 외롭다’, ‘아무도 자기를 돌봐주지 않는다’고 한다. 정말 외로우면 감방에서 가장 어려운 사람의 친구가 되어주면 안 외로울 것이다. 정말 세상에서 외롭지 않게 살려면, 내가 먼저 그 사람의 친구가, 이웃이 되어주면 참 재미있게 살 수 있다. 사랑은 남이 나에게 주는 게 아니고, 내가 남에게 내어주었을 때 생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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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욕심 나는 건 아이패드
 
 -사랑이 그런 건데, 노숙자들이 그런 사랑을 하고, 자립을 할 수 있는가.
 “노숙자들이 남을 원망하는 것을 많이 본다. 자신이 노숙자가 된 게 다른 사람이나 환경 탓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분들이 다시 살 희망을 내는 것이 언제인가. 그들이 언제 자립할 용기를 내는가. 자기가 도움을 받았을 때라기보다는 자기가 행복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다. 뭔가 평안을 느낄 때다. 그때 살아갈 의욕을 느낀다. 민들레국수집에 온 노숙자 손님들 중에서 ‘어렵다 어렵다’만 하는 이들은 도움을 받으면서도 끝내 살 의욕을 내지 못한다.
 그런데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들이 살아날 희망을 낸다. 어떤 노숙 손님에게 담배를 권하니, 자기는 가지고 있다면서 다른 사람에게 주라고 했다. 그런데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피우다만 꽁초 하나였다. 그가 식사하는데 조금밖에 안했다. 그래서 더 하라고 했더니, 자기는 이만큼만 먹어도 되니, 다른 사람들에게 주라고 했다. 이런 분들은 어느새 살 의욕을 내고 살아나서 나중에 선물을 사가지고 오곤 한다. 그래서 물질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나눌 줄 알고, 배려할 줄 아는 사람들이 살아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선생님도 세상에 버릴 수 없는 것, 욕심 나는 것은 없는가.
 “컴퓨터가 새로 나오면 갖고 싶다. 아이패드가 새로 나온다니 욕심도 난다. 새로운 기계가 나오면 해보고 싶은 욕심이 난다.”
 
 -민들레국수집을 혼자 운영하면서 정리할 게 많고, 연락할 때가 많아서 그런 기계가 필요한 게 아닌가.
 “핸드폰에 너무 많은 전화번호를 저장해서 핸드폰이 금방 고장 난다. 민들레국수집을 운영하면서 모든 전화를 혼자 받는다. 전화기가 고생을 좀 한다. 핸드폰을 너무 열고 닫아서 보통 일 년에 한 개 정도는 고장 나거나 용량이 초과해 못쓴다. 티브이 <인간극장>에 나오고 나서, 전화가 오는데, 24시간 내내 한 시간도 못 쉬고 며칠 간 전화를 받았다. 다른 사람이 받으면 화 좀 나겠구나 느꼈다.”
 

스스로 이야기할 수 있게 하자 상상도 못할 일들 벌어져
 
 -나도 장기수들 후원회에서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상대가 너무 외골수고 성격이 이상해 편하지가 않아 이제 편지 주고받는 것을 그만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서 선생님은 장기수 관련 일을 오랫동안 해왔는데, 어떻게 그런 사람들과 그렇게 오래도록 관계를 계속해올 수 있었는가.
 =수사로서 수도생활한 곳이 한국순교복자수도회였다. 그곳의 주보성인들이 한국 성인 성녀였다. 그들이 사형수 출신이다. 그분들을 본받아서 살려면 우리 복자회가 그런 일을 해야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했다. 1981-82년 교리신학원 다닐 때 학교를 빼먹으면서 의정부와 서울구치소 등으로 사형수들 만나러 다닌 적이 있다. 종신서원 하면서도 교도소 장기수들을 위해 일을 하고싶어 했는데, 기회가 안 닿았다.
 1995년부터 교도소 사목을 할 수 있게 됐다. 감옥 형제들 만나면서 행복했다. 편지도 하고, 책도 나누고, 많이 만날 때는 하루 편지 70-80통씩 나눴다. 감옥에 있는 형제들을 쫓아다니면서 어떻게 하면 잡범들을 멋지게 살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해방신학자가 쓴 ‘인생이 학교다’라는 책이 있다. 신부님이 브라질에서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감옥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교육하고, 활동하는 기록을 보면서 이게 필요하구나를 느꼈다. 그들에게 잘 살아라고 가르치는 게 아니고, 스스로 잘 살 수 있도록 했다. 스스로 이야기할 수 있게 하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그들이 스스로 말하기 시작했다. 자기 의견을 말하면서 변하는 모습을 보였다.
 내가 수도원을 나오게 되면서 감옥에 있는 백여 명의 형제들에게 수도원을 나온다고 전했다. 그랬더니 감옥 안의 형제들이 편지를 안했다. 도중에 파기했다고 나쁜 놈이라고 편지를 안한 것이다. 몇 명만 답장을 보내왔다. 내가 잘못했구나 생각하고 편지를 그만하고, 그들과 편지하는 것은 안사람에게 넘겨주었다. 아내가 사형수, 장기수들과 편지를 나누고 있다.
 감옥의 형제들이 편협하게 된 것은 배워 본 적이 없고, 사랑 받아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받는 것인 줄로 착각하고 사는 경우가 많다. 사랑을 주도록 표현하게 하면 서서히 변한다. 청송 경북 북부교도소에도 십여 년 간 다니며 적어도 한 달에 한번은 만났다. 만남이 끝나고 만원을 넣어주면 자기 몫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모습을 본다. 교도관 생활하는 분들이 믿을 수가 없다고 한다. 감옥의 형제들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표현하게 유도하는 게 중요하고 필요하다.”
 

 
눈에 콩깍지가 끼면 미운 게 안 보이는 것 같다
 
 -(사회자 황대권)저도 감옥살이할 때 13년이 넘게 편지를 받았다. 편지를 통해 으뜸 멘토를 만났다. 외국에서 저희 어머니뻘 되는 분이  깨알처럼 빽빽히 써서 편지를 보내왔다. 자기가 집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 다정 다감하게 쓴다. 그 집 사정을 빠삭하게 꿰는데, 그분의 다정다감한 사랑이 전염돼 정말 위로가 되었다. 의붓어머니로 삼게 됐다. 기대하지 말고 자기가 사는 얘기를 쓰면 된다.
 
 -선생님 얼굴을 보면 얼마나 행복한지 읽혀진다.  인간적인 좌절감이나 실망감을 느낀 적은 없는가. 평소 기도하는 내용은 무엇인가.
 “살면서 실망감은 거의 못 느껴본 것 같다. 오랫동안 노숙하는 형제들을 만나고, 감옥 형제들을 만나면서 그들이 잘 해준 것만 기억한다. 미운 것은 기억 안 나니 버티고 사는 것 같다. 눈에 콩깍지가 끼면 미운 게 안 보이는 것 같다. 해달라는 게 없으니 하느님한테 기도도 못하고. 어떻게 하면 하느님 마음에 들게 할 수 있을까만 생각한다. 주님 제가 무엇을 해드리면 좋겠습니까. 그렇게 하려고 애쓴다. 참 고마운 게 기도를 해도 하느님께서 잘 들어주신다. 뭘 해드릴까요 해서 잘 응답하는지. 하느님이 시키면 하는 것 이렇게 된다. 잘 들어주신다.”
 
 -기도의 예를 들어달라.
 “제일 기도 많이 할 때가 목욕할 때다. 욕탕 안에서 묵주기도 5단 정도 하면 땀이 난다. 10단 정도 하면 몸이 평안해진다. 묵주기도 할 때도,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서 하면 하느님이 좋아하실까 이 정도다. 25년 동안 수도원 살면서 기도도 못 배운 것 같다.”
 

자신을 위해 쓰라면 몇백 억도 터무니 없이 모자라
 
 -아이디를 ‘내가 없다’는 뜻의 ‘나무’라고 고쳐야겠다고 하시는데, 저는 아이디가 ‘재벌’이다. 제 가게 이름도 ‘재벌’이라고 지었다. 저 스스로는 경계인인 것 같다. 부자가 돼서 좋은 일 하고 싶다. 그러나 다 버려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아플 때 누구도 책임도 안 져주는데 기본적으로는 뭔가를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나, 벌어야 도움을 줄 수 있지 않나는 생각을 한다. 어디까지 버려야 하는 건가.
 “영등포교도소에서 강의하면서 2백 명에게 ‘얼마 정도의 돈을 가지고 있으면 다시 안 들어오고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으냐’고 물었다. 크게 나눠서, ‘몇억은 있어야. 다시 교도소에 안 들어오고 사회에서 평범하게 살겠다’고 했다. ‘3~4억이나 5~6억은 있어야 남부럽지 않게 살겠다’고 했다. 감옥에서 10~20년 살다 나오는데, 이분들도 적어도 몇억은 있어야 다시는 안 들어오고 살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래서 얼마 전 청송교도소 형제들과 재미있는 얘기를 했다. 언젠가 출소하게 될 때 미래에 법이 바뀌어서 국가에서 ‘징역 사느라고 고생했다’면서 ‘한 명에게 1억씩 주면서 ‘자기 자신을 위해선 한 푼도 써서는 안되고 남을 위해서 쓰게 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그 자리에 15명이 있었는데 14명이 ‘한 번도 남을 위해서 돈을 모아보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15번째 형제는 정부가 그렇게 하면 1억 가지고 도망가겠다고 했다.
 돈이 얼마나 있어야 행복할까. 자신을 위해 쓰라면 몇십 억이든, 몇백 억이든 모자란다. 터무니 없이 모자란다. 조정래 소설 <허수아비춤>을 읽어보니, 공부하고 박사학위 받은 사람이 회사에 취직해 스카우트 되어서는 스톡옵션으로 30~50억 받았을 때 시계 얼마짜리, 넥타이핀 얼마짜리 살까를 고민한다. 돈이 얼마나 있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다. 나를 중심으로 했을 때는 늘 모자란다. 남을 위해 쓰려면 300만원 만 있어도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다.
 2002년 12월 베로니카와 결혼하고 살면서 저는 집살림하면서 아내가 옷가게에서 번 돈을 쓰기만 했다. 제가 가진 돈을 다 털어보니 300만 원이었다. 고민고민하다가 300만 원을 가지고 국수집 차리기로 했다. 300백 만으로 시작한 국수집이 아직도 잘 돌아가고 있다. 아무리 많이 소유해도 행복할 길이 없고, 남을 위해 쓸 때는 조금만 가지고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남을 위해 쓸 때는 머리를 많이 굴린다. 공평하게 나눌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제 욕심을 위해서 쓸 때는 아낌없이 쓰게 되니 모자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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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만 하면 나갔다가 죽을 정도 되면 들어오기를 열댓 번
 
 -장기수를 교화시키고 노숙자를 자립시키는 일 하면서 개인적으로 언급할만한 분 사연은.
 =수도원 나올 때 50살이 다 됐다. 민들레국수집 하면서 인터뷰는 안하겠다고 했는데, 우리신학연구소 박영대소장이 사람들이 앉아서 밥 먹을 때까지는 하라고 했다. 거리에서 식사하는 분들이 안으로 들어와 식사하면 좋을 텐데 잘 안 바꾼다. 8년 동안 의자에 앉아서 하자고 하는데, 자연스럽게 되지는 않은 것 같다. <인간극장> 처음 나올 때 국수집에 있었던 친구 중 한 명이 교도소에서 나와서 함께 있었는데. <인간극장> 끝나고 도와주겠다는 전화를 받더니 언제부터 눈동자가 달라지더니 사고를 쳐버렸다. 그때부터 국수집으로 걸려 오는 전화는 모두 저 혼자 받는다.
 하지만 대중적인 환호는 아무것도 아니다. 항상 가슴에 담아 두는 게 예수님의 마지막 장면이다. 예수님을 그토록 환호했던 군중들이 결국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는 것을 환호하지 않았는가.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는 것을 알면 건방을 떨지 않고 살 수 있다. 교도소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이는 꼴베 형제다. 징역 20년 6개월을 다 살고 다시 감호를 살고 있다. 15년 전 교도관의 소개로 만났다. 만명 중 한 명 있을까 말까한 희안한 친구다. 정말 멋진 친구다.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친구로, 도저히 변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든지 변했다고 믿는 친구다. 감옥 안에서도 노약자와 무기수들을 돌봐주고 있다. 20년 전엔 먹을 게 있으면 감옥에 들어가 혼자 먹었다. 지금은 먹을 게 있으면 친구들을 먼저 먹인다. 친구들 먹는 모습 보는 게 보기가 좋다고 한다. 멋지게 변한 친구다.
 민들레국수 집의 화두가 된 것은 첫 번째 손님 대성 씨다. 지금은 알콜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했다. 2003년 첫 손님으로 왔다. 살만 하면 나갔다가 죽을 정도가 되면 들어오기를 열댓 번 반복했다. 점점 그 기간이 길어졌다. 차음엔 한 달에 한 번 정도 나가더니 이제 몇 년 만에 나갔다가 들어왔다. 지난번은 평범한 사람으로 변한 것으로 믿었다. 살림 사는 재미를 붙인 것 같았다. 동네 사람들과도 재미 붙이고 사는가 했더니 살던 집에서 쫓겨나고 노숙했다. 그래도 도와달라고 안하더니, 한 달 전 거의 죽을 때가 다 돼 도와달라고 했다. 이제 또 나갈거냐고 했더니 이제 안 떠날 거라고 한다.”
 

(아내) 항상 예쁘다고 그러고 칭찬하니 잘 안해줄 수 없어
 
 -(사회자 황대권) 박기호 신부(예수살이공동체 대표)는 서 선생님을 거리의 성자라고 표현했다. 노숙자들의 행패와 알코을 중독자들의 모습을 참아내는 게 가능한가. 책을 보면 못된 짓 하는 박씨가 등장하는데 그렇게 구제불능처럼 보이는 사람을 어떤 생각으로 참아내고 견뎌내는가.
 “박씨가 아니고, 본래는 양씨인데, 양씨로 하면 주변 사람들이 누군지 알까봐 그렇게 표현했었다. 그 친구가 정말 나쁘다기보다는 사회가 나쁜 게 있다. 그가 처음 교도소 가게 된 것은 아버지가 고소 고발 당한 이후였다. 가정부터 문제가 있었다. 평생 다른 사람 괴롭혀야 자기가 살 줄 알고 살았다. 인천에서 몸 파는 불쌍한 아가씨들을 등쳐먹고 살았다. 노숙자들 등쳐먹고 살다 죽었다. 죽기 전 함께 살던 여자가 죽고나서 보상금 1천5백만원이 생겼다. 그는 은행도 못 믿는다면서 내게 맡겼다. 자기는 세상에 믿을 사람이 나밖에 없다며 자기를 미워하지 마라고 했다. 그가 죽은 다음에는 좀 더 잘해줄 것을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사모님이랑 지금도 사랑하는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가.
 “나는 없다는 그런 마음으로 사랑하고 있다. 저보다는 베로니카께서 말해주면 좋겠다.”
 
 (서영남 대표 부인 베로니카) “아침에 일어나면 집안 일을 다 해준다. 목욕물까지 데워준다. 차도 태워주고 대접해주니 늘 제가 더 잘해야겠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항상 예쁘다고 그런다. 칭찬도 많이 해주고, 진심으로 하는 게 느껴지니까 잘 안해줄 수 없다. 하루종일 지하상가 옷가게에서 일하면서 조금 번 돈으로 콩나물국이라도 끓여 먹어야 하는데, 날이 추우니 내복 20~30벌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지갑을 열지 않을 수 없다. 무소유로 사는 것 자체가 행복한 것 같다. 교도소에서 수술해야 한다고 50만 원 필요하다고 할 때 국 끓일 돈 없어도 그것을 통장이 텅 빌 때까지 아낌없이 내놓으니 제 마음도 움직인다. 그래서 행복하다.”
 

손님은 많아지고 돈을 떨어지고 아내 가게도 안되고
 
-노인들을 위한 무료급식소가 근처에 여러 개 있는데 왜 또 만들었는가. 민들레국수집이 실제로 어떻게 운영되는가.
 “2003년4월 민들레국수집을 만들었다. 사전에 여러 군데 답사해 보았다. 고민고민했다. 인천에 경로식당은 많이 있다. 65세 이상 노인이면 누구든지 식사할 수 있다. 서울과 달리 노숙할 수 있는 식당은 한 군데도 없었다. 길에서 드는 분들 위해서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또 깊은 꼼수가 있었다. 서울에 만들면 손님들이 너무 많아 망할 것이니 인천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인천엔 노숙하는 분들을 도와주는 데가 별로 없어서 노숙자들이 120여 명 정도밖에 안됐다.
 국수집을 시작하면서 정부지원을 받지 않고, 프로그램 공모해 예산확보하는 일 안하고, 후원회 조직 안하겠다고 생각했다. 부자들이 생색 내는 것 안하겠다고 했다. 착한 사람들이 모아주는 후원만 받겠다고 다짐했다. 아내의 후원을 받고 그렇게 꾸려나가기로 했다. 그렇지 않으면 문을 닫아야겠다고 시작했다. 노숙자들은 눈치밥을 안 먹어야 한다. 아무리 잘 먹어도 그게 눈치밥이면 생명 유지하는 게 잘 안된다. 많은 사람들이 돈이 없고, 인력이 모자라서 못한다는데 그게 큰 문제다. 세상에 돈이 그렇게 많고,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못한다는게 이상하지 않은가. 그래서 돈 없이 시작해본 것이다. 1930년 미국 대공황 때 미국에서 시작한 식당이 지금까지 지속되는 것을 보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산 확보 안하고, 후원회 조직 안 만드니 어떻게 운영할까. 먼저 내가 가진 것을 다 털자. 전부를 털면 사람들도 같이 털지 않겠는가. 예수님도 그러셨으니 그렇게 하자. 그해 겨울쯤 되니 약간 불안하기 시작하더라. 손님들은 많이 오고, 돈은 떨어지고, 베로니카 가게도 잘 안되고, 돈 타는 것도 미안했다. 후배 신부님에게 도와달고 했더니 그런 소리 하려면 앞으로 전화하지 말라고 했다. 기찻길옆 공부방에 연락해 100만 원을 빌려달라고 했더니 못 빌려주겠다고 해 잠시 절망하고 있는데, 빌려는 못 주고 그냥 주겠다고 했다. 기찻길옆공부방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데, 우리가 못하니 그냥 드리겠다’고 백만 원을 줘서 그 덕분에 국수집 위기를 넘겼다.
 

일반 복지시설처럼 회계 공개해야 되나 고민고민
 
 지금도 계속 고민하고 생각하는 게, 도와주는 사람들 뜻대로 해야 하는가다. 고민고민 많이 했다. 일반 사회복지시설이 회계 공개하듯 해도 될까. 혼자 힘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안되겠더라. 사회복지시설처럼 회계하는 것도 딜레마가 있더라. 내 고집대로 하자. 어떤 분이 투명하게 공개하는 게 옳은 게 아니냐고 물었다. 고민고민해 결론 내린 게, 그렇게 해야 한다면 후원금 받는 것을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국수집은 직원도 없고, 자원봉사자도 체계가 없다. 아침에 갈 때 오늘 어떤 봉사자가 올지 모른다. 오전 10시에 문을 여는데 8시나 8시 반이 되면 자원봉사자들이 한 분 한 분 온다. 10시나 11시 되면 자원봉사 체제로 굴러간다.
 요즘은 민들레국수집만이 아니라 어린이 밥집, 민들레 희망지원센터에 큰호박(아내)과 작은호박(딸)도 돕는다. 작은 호박인 모니카는 어린이공동체를 맡아서 하니, 정해진 직원이 없이도 돌아가고 있다. 사회복지계의 이단아가 됐는데, 예산을 확보하지 않고 회계정리하고 기록하는데 사람이 없으니 힘들지 않게 돌아가고 있지 않나. 어떨 때는 자원봉사자들이 많이 온다. 어제 오늘 10명, 20명이 왔고, 어떤 때는 30명도 온다. 어제 오늘 김치 150포기를 담궜다. 김치를 많이 담으면 동네 할머니들이 전부 와서 거들어주고 버무려준다. 봉사자가 없는 날도 있다. 식사하러 온 손님들이 손씻고, 앞치마 두르고 설거지하고, 채소 다듬어 자연스럽게 돌아간다.”
 

줄을 서게 하면, 사람들이 비인격적인 대우 받기 쉽다
 
 -민들레국수집은 6명이 앉을 공간밖에 없는데 그 많은 자원봉사들이 들어설 공간도 없지 않은가.
 =자원봉사자들이 들어올 공간이 없어서 길에서 봉사한다. 처음엔 더 작았다. 식탁도 중고품 가게에서 샀는데, 4분의 1을 잘라 겨우 들어왔다. 사람들이 밖에서 기다리는 게 가슴이 아파서 10명쯤 앉는 식탁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2008년 그렇게 됐다. 한꺼번에 열 분이 앉는데 한 시간에 67분까지 식탁에서 식사할 수 있다. 7시간이면 420명이 식사하는 게 가능하다. 보통 300명까지는 돌아간다. 일하는 사람도, 밖에서 기다라는 사람도 힘들다. 2008년 상금을 타 옆집 쌀가게로 넓혀 24분 정도가 동시에 식사할 수 있게 됐다. 한 시간에 100분 이상 식사하는 게 가능하다. 요즘은 500명 넘어도 식사할 수 있다.
 무료급식소 하면 떠오르는 게 긴 줄이다. 줄을 서게 하면, 사람들이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기 쉽다. 한꺼번에 사람들이 몰릴 때 익명성을 보장해주기 때문에, 굉장히 무례해지기 쉽다. 우리 손님들의 착한 마음들을 어떻게 끌어낼까. 이름을 불러주면 달라진다. 줄 서게 하는 것도 고민이었다. 보통은 선착순으로 밥을 주는데, 선착순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 자문해보지않을 수 없다. 진짜 차례를 세우려면 힘없고 약한 사람들부터 1순위로 해야 되는데 선착순으로 하면 힘센 사람들부터 먹게 된다. 그래서 손님들을 설득했다. 세상 경쟁에서 져서 내 힘으로 밥 한그릇 먹기 힘들게 됐는데, 여기서까지 경쟁으로 순서를 정하면 되겠는가. 우리는 순서를 좀 바꾸자. 배고프고, 약한 사람부터 먼저 먹이자고 했다. 처음에는 힘들게 줄섰는데 다른 사람 먼저 먹게 하자니 억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다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이 늦게 와도 밥먹게 하는 것을 보고 찬성했다. 줄을 안 서도 배고픈 사람이 먼저 먹게 되었다. 그러니 앞서 식사하는 이들도 뒷사람들을 생각해 빨리 먹게 되었다.
 

수도원 라면식사 때 맨꼴찌인 막내들이 배부르게 먹는 이유
 
 수도원에서 지내던 어린 시절 기억이 난다. 76년에 들어갔을 때 수도원도 가난해서 아침마다 라면을 끓여서 식사를 했다. 선배 수사부터 배식판에 라면을 덜어주고, 제일 마지막 막내들이 먹었다. 그런데 많이 끓이나 적게 끓이나 꼬마들이 제일 많이 먹었다. 어른 수사들이 퍼가면서 배려한 것이다. 중간에서 좀 못 미치는 사람들이 제대로 못 먹었다. 노인도 꼬마도 아닌 힘센  중간 수도자들이 뒷사람까지 라면을 갈지 안갈지 배려하려다보니 늘 조금씩 먹게 되고 막내들은 배부르게 먹었다.
 인간답게 사는 것, 평화롭게 사는 것은 꼴찌부터 배려하는 것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다. 타이타닉호가 침몰할 때 구명정에 어떤 사람들이 타야하는가. 사람다운 사람, 생명과 평화가 넘치는 세상이 되려면 열이면 열, 아이들과 노인들을 먼저 태우고 힘센 사람들이 뒤에 남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줄서는 것만 바꿔도 이뤄진다. 선착순이 아니고 힘없는 사람들부터 줄서는 것을 해보고 나도 놀랐다.”
 
 -그 얘기를 정부 정책 당국자들이 알면 세상이 바뀌겠다. 꼭 필요할 때 채워주는 민들레국수집의 기적의 법칙은 무엇인가. 
 “국수집 5년째 되는 해 뭘 하면 좋을까를 생각했다. 어떤 때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고 힘들기도 하고, 희망을 가져야 하는지 고민도 됐다. 아이 때부터 해보면 어떻까. 공부방도 못 가는 아이들을 위해 만원을 가지고 우체국 통장 만들어 만원으로 시작했다. 홈페이지에 전세금으로 200만 원만 모아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100일째 되는데 2천 몇백만 원 모아져 공부방을 시작했다.
 동네에서 밥도 못 먹고 불량식품 먹는 아이들 위해 어린이밥집 한번 만들면 좋겠다고 했다. 또 그 어린이들이 책을 볼 수 있는 도서관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난한 아이들이 꿈이 없었다. 꿈이 뭐냐면 배부르게 먹고 잠자는 것이라고 했다. 이게 동네 아이들의 꿈이었다. 그들이 책을 보고 문화적인 체험을 할 수 있는 민들레책 도서관을 만드니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다. 국수집을 하면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보다 간절한 꿈을 많이 꾸게 되었다. 요즘 더 더 많은 꿈을 꾸려하니까 딸이 아빠 제발 꿈 그만 꾸세요라고 한다.(청중 웃음)”

 
결혼하고 작은 호박까지 횡재했는데, 자식 욕심까지 부리면 탈
 
 -아이들 때문에도 속상한 적이 많아 화가 많이 나는데, 선생님은 딸  때문에 속상한 적은 없었는가.
 =글쎄요. 우리 딸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는 게 느껴진다. 처음엔 딸이 ‘아빠’라고 불러도 몰랐다. 누구를 부르는 건지도 몰랐다. 저런 큰딸을 그냥 얻은 나는 복이 많다. 처음 같이 살 게 되었을 때 얼마나 공부를 안 하는지 걱정이 됐다. 어떻게 하면 공부를 하게 할까 고민하다가 책 한 권 읽으면 만원 주기로 했다. 금방 읽을 수 있는 책만 골라서 주었던지 책을 잘 읽었다. 그 다음엔 돈을 안 줘도 책을 잘 읽었다. 그래서 장학금까지 받아왔다.
 젊으니 친구들과 놀다가  늦게 들어오기도 한다. 몇 시까지 놀다 들어올지 약속하고 나가게 했다. 그리고 돌아올 시간쯤 돼서 아파트 밖에서 기다렸다. 수도원에서 오래 살면서 기도하는 게 습관이다. 묵주 기도하면 금방 오는데, 딸이 나를 보고 깜짝 놀란다. 정작 밖에서 기다릴 줄 모른 것이다. 오래 기다리다가도 기도하는 중이었기에 기도하다 성질 낼 수는 없다. 그랬더니 마음이 통했는지 우리 딸이 집을 더 좋아하는 집순이로 변했다.”
 
 -결혼하고 아내와 사이엔 아이는 안 낳았는데, 가지려고 노력은 안했는지.
 =사람은 생명을 이어가고 싶어한다. 그러나 사람의 생명이라는 게 혈연으로만 이어지는 게 아니다. 정말 마음으로 통하고, 사랑으로 통하면 이어지는 것이다. 결혼하고, 작은 호박까지 횡재했는데, 여기서 자식 욕심까지 부리면 탈나지 싶다. 자식에 대해선 꿈도 안 꿨다.”
 
 -바쁘게 봉사활동하며 부부생활은 합니까.
 “(끄덕 끄덕)”
 

연평도 남-북 싸움, 동네 아이들도 그렇게는 안 싸워
 
 -연평도 사건으로 남북이 경색되고 있다. 어찌 해야 하나.
 “나라와 나라가 싸우면 어른스럽게 싸우는 줄 알았는데, 동네 아이들과 흡사하다. 아이들도 그렇게는 안 싸운다. 정말 유치하게 싸운다. 예수님은 목숨으로 말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다. 전쟁이란 정말 일어나면 안된다는 것이다. 전쟁 이후에 태어나 부모님 사는 것을 보고, 이산가족들의 피눈물 보면서 성경대로 무기들은 농기구로 바꾸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했다.
 얼마 전 국수집에 경찰에서 봉사 와서 여경들이 평양에도 민들레국수집 차리면 참 좋겠다면서 평양에도 차려달라고 했다. 기회가 된다면 평양에도 민들레국수집 만들면 좋겠다. 그게 선한 대다수 사람들의 생각이 아닐까. 동네에서 한 대 맞은 사람들이 상대방을 몇 대 더 때려야 한다는 애기 들으면 가슴 아픈데 지금 우리 정부가 그러고 있다.”
 
 -노숙자 제일 큰 문제는 알콜 문제인데, 알콜 중독은 치유가 가능한가. 그동안 경험을 통해 듣고 싶다.
 =알콜 중독자들의 특징이 사랑받고 싶어한다. 뭔가 채워지지 않아서 난폭하지도 못하고, 어떻게 하든 살아볼려고 애쓰는데 안되는 경우가 많다. 민들레국수집 식구 중 이슬왕자님은 병원에 7~8번을 입원시켰다. 알콜 중독자들은 술 안 마시면 건강해진다. 정신병동을 싫어해 나왔다가 또 병원에 가고, 지금 5년째 들어갔다가 나왔다를 반복한다. 인천에선 초기 노숙하던 분도 국수집에서 방 얻어서 살게 하는데, 2주일 정도 술 취하고 다시 정신 차리고, 요즘은 몇 달만에 한 번씩 발동이 걸린다. 이제는 잘 살 것같은데 아직도 안된다. 대성 씨도 1~2년 안 마시다가 원상 복귀했다. 이것이 암보다 무섭지 않은가. 살아있는한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다. 죽을 때쯤 되면 못 먹겠지. 차마 내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많이 느낀다. 알콜 중독자는 암보다 위중한 병에 걸린 사람들이다. 돌봐주고, 희망의 끈을 마지막까지 놓지 않고 기다려 주는 길밖에 없다.”
 

청송교도소 흉악범 출신 소문에 인상 한번 그으면 기겁
 
 -화가 나거나 짜즘이 나면 어떻게 해결하는지.
 “어지간해서 화가 잘 안 난다. 그게 왜 그러냐하면 2003년부터 노숙자들을 만났는데, 그 전에 예방주사를 많이 맞았다. 출소한 사람들과 살다보니 노숙자들이 진짜 천사처럼 느껴졌다. 술 먹고 성질 부려도, 애교스럽게 봐줄 수 있게 됐다. 요즘 재미있게 느끼는 것이 있다. 민들레국수 집에서 술 먹고 이웃 괴롭히는 분이 있었다. 그런데 그분이 저한테 겁을 느낀다. 이상한 소문 때문이었다. 노숙자들 사이에서 저분이 청송교도소에서 오래 살고 나온 흉악범이라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제가 정색을 하고 ‘마음 좀 잡고 살아볼라고 했더니’ 하면 기겁을 한다. 가끔 손님 중에 ‘당신은 청송에 갔다왔지만 나는 교통사고로 대전교도소 밖에 다녀온 게 없다’고 하기도 한다.(청중 웃음)”
 
 -어떻게 성장했는가. 부모님은 어떤 분이었나.
 “어머니가 92살이다. 8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7남매를 키우고 살았다. 한 번도 화를 내거나 삶을 걱정한 것을 본 적이 없다. 어떻게 그렇게 삽니까고 물으니 당신은 쌍둥이인데, 쌍둥이 언니와 시집 올 때까지 한 번도 못 싸워보았다고 했다. 동네 어른들이 누룽지를 주면 반을 나눠서 좀 큰 것은 언니 주고, 언니도 과자를 받으면 좀 큰 쪽은 자기를 주니 많이 먹으려고 싸울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한번 싸웠다고 하는데, 장면 부통령을 찍느냐, 이기붕을 찍느냐로 다투어 어머니가 이겼다고 했다. 어머니가 사는 것을 본 건 그거밖에 없다. 지금도 어머니 사는 모습 보면 흉내 좀 내고 살자는 생각이 든다.
 

존재하는 것만으도 귀중하게 여기는 마을 하나 만들었으면
 
 -새로 꾸는 꿈이 있는가.
 =처음 국수집 시작할 때는 배고픈 사람들에게 밥 한 그릇 주는 일이 큰 일이라고 시작했는데, 밥은 당연하고, 그 외 필요한 게 많았다. 문화적인 혜택을 충분히 드릴 수 있을까. 음악을 듣고, 차도 마시고, 낮잠도 잘 수 있고, 컴퓨터 게임도 할 수 있고, 영화도 볼 수 있게 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언제 변하려고 마음을 먹는가. 의식주가 위협받을 때는 변할 마음을 못 낸다. 생존해야 되니 다른 것에 신경 못쓴다. 목숨이 위태로운데 어떻게 하겠는가. 편안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주어야 한다.
 술만 먹지 않는다면 노숙자들 누구나 와서 즐기다가 저녁 6시가 되면 다시 노숙하러 나갔다. 왜 잠자는 것을 먼저 해주지 않느냐고 하나 노숙의 자유가 있다. 자기가 노숙이 싫을 때 그만 둘 수 있다. 낮에 깨끗하게 하니 노숙하는 것을 어려워하고 살 궁리를 하기 시작하더라. 책 한 권 읽고 독후감 이야기하면 3천 원 드리겠다고 했다. 두 권만 읽어도 6천 원을 받아 찜찔방에서 편히 잘 수 있으니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자 변화 속도가 빨랐다. 자기표현도 못한 사람들이 장려금 받기 위해 훈련하니까 스스로 일자리 찾고 우울증에서 변화해갔다.
 요즘은 새로운 꿈이 있다. 10여 년 교도소 다니니 20년 다니던 분들도 출소할 시일이 얼마 안 남았다. 알코올 중독자들도 살기 어려우니 그런 이들을 위한 마을을 하나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민들레마을을 꿈꾸는데 땅이 있어야 하는데, 뭔가 도와줄 게 없느냐고 어느 분이 얘기를 해서 땅이나 몇 천 평 주십시오 해서 땅이 생길 수도 있겠다싶다. 일을 해야만 사는 게 아니고, 존재하는 것 자체만 해도, 귀중하게 여기는 그런 마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는 일이 많아서 피곤할 텐데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나.
 “쉽게 일하는 법이 있다. 제일 중요한 일부터 먼저 하면 바쁜 게 별로 없다. 이것부터 하나씩 하나씩 하면 된다. 안 바쁘게 살 수 있다.”
 

젊은 부부에게 이혼하지 않으면 도울 길 없다는 국가
 
 -돈을 전부 봉사에만 갖다 쓰고 옷이나 다른 것도 사주지 않으니 딸은 불만이 없는가.
 (딸 모니카)“다행히 덩치가 작아 엄마가 가게에 내놓았다가 안 팔리는 옷을 입고 있다. 어린이공부방을 하면서 사회복지 공부 다시 하고 있다. 제가 더 행운이다. 아버지와같은 분과 사는 게 제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제가 더 못 도와드려 죄송할 뿐이다.
 
 -아직도 자기 집 한 칸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나.
 =집이 없는 사람들과 제가 함께 산다. 얼마 전 원주에서 전화가 왔다. 부부가 36살인데 세 아이와 2월부터 거리에서 살았다. 주민센터에서 사정을 얘기하니 이혼을 하면 도움 받을 길이 생긴다고 했다고 한다. 젊은 부부가 이혼하지 않고는 도움 받을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민들레국수집 근처로 오면 작은 방이라도 얻어주겠다고 하니 왔다. 암담하다. 국가가 가족들이 살게 해야 하는데 이혼하지 않으면 돕지 못한다고 한다. 가슴 아픈 일이다.
 작년엔 생후 7개월 된 아이를 데리고 부모가 노숙을 하고 있었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심장이 나빠 수술을 했는데, 전세 빼고 아이 아빠가 백방으로 뛰어다니다가 돈을 빌리러 누군가에게 인감을 떼어주었는데 500만 원도 못 받고 빚을 떠안았다. 주거권은 절실하다. 얼마 전 라디오를 듣는데, 어느 분이 집이 157채인데, 어떻게 하면 세금 줄일 수 있느냐고 상담하더라. 안타깝다. 민들레국수집 하면서 보증금 100만 원, 월세 10만 원하는 집을 할머니에게 얻어주었다. 그 할머니는 새벽부터 파지를 줍는데도 재산세 낼 돈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보증금을 못 받았다. 우리의 권리를 찾고 이런 것보다 사람답게 살 길이 왔으면 좋겠다.”
 
 -무소유의 삶은 무엇인지.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가난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자기 것을 다 내놓아도 아깝지가 않다. 베로니카(아내)를 보면 많이 느낀다. 옷가게를 하면서 사랑에 빠져서 더 못 줘서 안타까워한다. 사랑만이 용기를 내게 한다. 무소유를 얘기하기 전에 우리 마음에 얼마나 사랑이 있는지. 내가 정말 나만 사랑하고 있지 않은지.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봐야 한다.
 

글 정리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사진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